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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북 만들기의 실제
Book with Poster, Production SR, 2011
가이드북 만들기의 실제
Book with Poster, Production SR, 2011
Tourmap:Songdo
Leaflet, 2010
Tourmap:Songdo
Leaflet, 2010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정물
Installation, 2007-2009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정물
Installation, 2007-2009
'안녕없는 생활들, 모험들' 개요
Postcard, 2011
'안녕없는 생활들, 모험들' 개요
Postcard,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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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120 x 200 mm, 149 pp. Poster, 1000 x 600 mm; 120 x 200 mm 30pp when unfolded.
Artists: KimChangPractice!!, Matteo Orsini, Leyla Stevens, Daniel Wang ; 협업: Kit-toast (전시), Press Kit Press (출판;디자인)

“지역 안내서 만들기의 실제 The Practice Making of a Guidebook”는 KimChang Practice 김장프랙티스!! Leyla Stevens 레이라 스티븐스, Matteo Orsini 마태오 올시니, Daniel Wang 다니엘 왕, kit-toast 킷 토스트의 협업으로, 개인적 기억과 경험에 기반한 지역 가이드북을 제작하는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2010.4-12 동안의 작가별 자료 교류를 바탕으로, 전시(2010.12.9-12.15 스페이스 빔/ 2010.12.27-12.30 platform slowrush/ 공간디자인 협업작가 kit-toast)와 출판(production SR, 2010.12/ 출판 개념디자인 협업작가 press kit press) 로 진행되었다. 상이한 환경에 거주하는 예술가(혹은 비예술가)들은 서로의 지역(도시, 거주지, 장소)을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예술가(혹은 비예술가)에게 자신의 지역에 관한 정보(텍스트, 이미지, 사운드, 오브제)를 제공한다. 타 예술가들에게 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개별구성원들은 그 지역을 상상하여 가이드북을 작성한다. 사실상 이렇게 제작된 안내서는 그 지역의 일반적인 특징을 꼭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수용자는 이러한 주관적 경험의 정보를 다시금 해석함으로써 사실 그 지역을 경험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된다. 이 가이드북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지역의 정보는 취사 선택되며, 또한 수용자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되는 정보는 오독과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친다.

개인적 인상으로 이루어진 지역의 정보는 일반적인 관광객을 위해 제공되는 단일한 시점을 지닌 묘사 혹은 객관적인 정보라기 보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체험인 다층적인 시점을 담아낸다. 원거리에 위치한 서로 다른 두 지역은 지역이 속한 문화정치사회의 영향으로 가시적으로는 차이점이 부각되겠지만 지역의 주관적인 경험으로서의 정보는 장소에 기반한 개인의 체험 혹은 기억이라는 측면에서 장소가 가진 유사성이 드러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터내셔널과 로컬이라는 경계는 개인의 기억이나 삶의 영역에서 겹쳐지면서도 혹은 분리된다.

출판된 ‘지역안내서 만들기의 실제’ 는 서로 주고받은 ‘자료’ 와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가이드북’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의 지역 안내서가 설명하고 있는 각 지역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역의 특징을 일종의 태그처럼 뽑아 인덱스에 나열하였다. 각 태그에 부합하는 지역은 인덱스에 페이지를 표기하였으며, 태그는 다음과 같다.

  • 김장프랙티스!!KimChangPractice!! 레이라Leyla Stevens, 농장farm, 가족사진family photograph, 유년기 childhood, 고향hometown, 차이나타운china town, 정체성identity, 민족성 ethnicity, 인천Incheon, 마테오Matteo Orsini, 피츠버그 Pittsburgh, 송도Sondo, 인터내셔널Intenational, 도시화 urbanism, 퓨쳐future, 이웃neighborhood, 청주Cheongju, 이사/이동move, 답사fieldtrip, 아무것도nothing, 다니엘 Daniel Wang, 상해Shanghai, 택시taxi, 싸움fight, 출신지, 이방인stranger, 쉬는 구역 resting area, 기념품souvenir, 빈방empty room, 이메일emailchat 제스처gesture


  • 지역연구의 일환인 이러한 이 프로젝트는 양 방향에서 이루어 지며, 각각 작가들은 정보의 제공자이며 수용자가 된다. 타인의 경험과 나의 경험의 상호작용으로 대상을 이해하는 과정은 일종의 ‘학습’ 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식의 전달을 위한 일방적인 수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 전달을 위해 선행되는 사전학습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즉,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안내서’는 한편으로 정보 습득과정의 목적으로 가장 적합하다. 결국 미래의 정보 수용자가 가장 중요한 정보의 제공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호교환은 학습자와 수용자의 거리를 축소하면서 동시에 네트워킹을 이루며 이것은 정보교환을 하는 능동적 커뮤니티의 한 모습일 수 있다. 프로젝트의 진행과 더불어 전시 및 출판과 같이 다양한 형식으로 귀결되는 “지역 안내서 만들기의 실제” 는 결국 기획의 김장프랙티스!! 와 참여작가 및 협업작가들의 얽히고 섥힌 네트워크 망을 형성하는 것 그 자체일 수 있다. 이 관계망과 그간 주고받은 자료명과 이미지는 지역안내서 만들기의 실제 – map 이 보여주고 있으며 각각의 점들을 이어주는 복잡한 선들은 프로젝트 그 자체인 셈이다.
    138 x 120 mm, 12pp; 544 x 360 mm when unfolded; cro:the invisible : slowrush를 위한 홍보물.

    “유령 the invisible” 프로젝트로 진행한 Tourmap : SONGDO 는 송도 국제도시 건설현장에 대한 답사를 기반으로 하여 21세기 이후 신도시의 형성기반과 구/신도심의 역사적 맥락, 그리고 도시문화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했다.

    Tourmap : SONGDO 는 개발지향, 목적지향으로서의 송도국제신도시의 모토가 마치 소실점으로 회귀하는 근대 권력과 유사함에 집중하였다. 송도국제신도시는 거대한 행정적 지휘통솔과 경제적 논리에 경도된 소시민들의 열망이 더해져 있는데 이러한 욕망, 권력, 자본 등과 같은 개념은 상징적으로 혹은 복잡한 이데올로기와 함께 이해되었다. 하지만 송도국제신도시는 마치 그 모든 추상적인 단어가 구체적으로 구현되어 거대한 토목공사로 현실의 삶 속에 정착한 듯 하다. 감히 실체를 드러낼 수 없었던, 드러내지 않았던 것들이 거대한 도시풍경을 이루었다.

    Tourmap : SONGDO는 건설현장을 지금 이곳을 가장 잘 드러내는 특성으로 보고 이를 안내하는 투어맵이다. 건축물의 철제 골격과 대형 크레인, 공사 가림막, 지반공사 등으로 펼쳐진 풍경은 메트로폴리탄이나 한국 신도시 교외의 어느 곳과도 다른 스카이라인을 갖는다.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변하는 스카이라인은 그 자체가 시차에서 오는 가변적이고도 가상적인 선이다. 따라서 관찰하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스카이라인이 존재한다. Tourmap : SONGDO 는 송도국제신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확인할 수 있는 ‘그 곳’ 을 찾도록 안내한다. 그런데 ‘그 곳’ 은 앞서 언급한 소실점과 같이 그 자리에서 서도록 강요되는 ‘지점’이다. 송도국제청사진처럼 송도를 바로 보기 위해서 청사진을 찍던 위치에서 봐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Tourmap : SONGDO에 제시된 12개의 스카이라인을 확인하려면 송도국제신도시의 공사현장을 샅샅이 살펴야 한다. 그 여정을 이끄는 것이 tour map : SONGDO 이며 이것은 일종의 게임이기도 하고, 송도국제신도시를 경험하게 하는 하나의 이정표이다.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정물>은 2007년 지역과 미술에 관한 프로젝트인 <동아시아의 목소리>(기획:대안공간 풀)라는 프로그램에 의해 기획되었다.
    우리는 동아시아라는 지역의 정치ㆍ문화적 지형도를 되짚어보며 미술로서 이에 대한 순환적 이해를 도모하는 프로그램의 취지하에, 한국이라는 하나의 문화권 안에서 비주류 민족으로서 혼재된 정체성을 지닌 차이나타운의 모습을 포착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내의 정치적 상황과 이에 맞물린 국제 정세 즉,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한국 의 상황 속에 변화하고 갈등하는 화교의 민족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자국의 문화와 역사를 지켜가고자 하는 차이나타운의 여러 모습은 그 자체가 내륙에 위치했지만 정치적으로 고립된 섬 아닌 섬의 인상을 받기도 하였다. 더욱이 관광산업을 위한 문화 마케팅의 소재로써 소비되는 차이나타운의 모습은 그 외피만이 존재하는 차이나타운의 현재를 드러내는 듯하다. 이러한 차이나타운의 모습은 민족, 문화, 정체성 등이 정치적 상황 혹은 국제 정세와 함께 점철된 동아시아의 근대화의 일면을 담아내는 지역적 특징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이에 인천의 차이나타운을 답사하면서 이를 다룬 풍경 사진과 거리에서 채집한 오브제들로 차이나타운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다.
    KimChang Practice!!는 김민경 장윤주의 협업 프로젝트로서 도시, 공간, 커뮤니티, 채집, 리서치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전시, 출판, 웹사이트의 다양한 매체로 결과물을 드러낸다. 이것은 실제적 태도를 취하며, 의식화된 행동이나 사명감을 배제하고 개인적 취향을 존중한다.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서 개념이나 사고보다 신체를 움직이고 이용하는 것, 반복적 숙달로 익숙해 지는 것, 익숙함과 숙련을 위한 체험의 기회를 주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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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되지 않은 기억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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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과 더불어 살기 :
    88만원 세대의 새로운 정치학
    환상과 더불어 살기 :
    88만원 세대의 새로운 정치학
    환상과 더불어 살기 : 88만원 세대의 새로운 정치학
    조선령(백남준아트센터 학예팀장), 문화과학 59호, 2009 가을

    독일 적군파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바더 마인호프]를 무척 보고 싶었는데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아직 보지 못했다. 봤더라면 할 이야기가 더 많았을 것 같아서 조금 아쉽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영화에 대한 평이 아니라 이 영화의 개봉 자체가 무척 징후적이라는 소감이다. (그러니까 왜 이 시점에서 이런 영화냐고!) 몇 년 전 베를린에 출장을 갔을 때, 역시 적군파를 다룬 전시 [테러의 표상 – RAF 전시]를 보고 적군파의 존재는 독일 역사의 강렬한 트라우마 중 하나라는 사실을 실감한 적이 있었다. 영화 소식을 접하면서 그때의 감상이 되살아났다. 지금은 그것이 단지 ‘독일’의 트라우마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한층 더 거기에 필연성을 부여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내가 즐겨 읽는 모 영화잡지의 모 칼럼에서 이 영화에 대해 연민의 시선이 담긴 구절을 접했다. 이분은 “왜 저렇게들 유연하지 못했을까 왜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을까”라고 쓰면서 적군파들의 행동을 ‘지나간 그때 그 시절의 가치관’이라고 보시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테러를 통해 국가권력과 가진자들에게 도전하겠다는 적군파의 행동은 상당히 업데이트한, 탈근대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범죄를 통해서만 범죄에 도전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상황은 자기가 속한 세상과 자기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타자에 대항하는 길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자가당착의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맥루한-보드리야르-비릴리오 계보가 즐겨 사용하는 용어대로 말하자면) 더 이상 ‘외파’가 불가능하고 ‘내파’만이 가능하다는 그 매우 포스트모던한 경우 아니었을까?

    슬라보예 지젝의 논리를 빌어 이 상황을 좀 더 논해보자.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사회의 합리성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합리성 바깥의 세상에 대한 집착과 믿음을 더 강하게 가진다. 그런 세상의 존재성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의 비존재성을 믿는다. 우리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거야”라는 문장 속으로 도피한다. 현실이 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바깥’은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적군파가 한 일은 이 바깥에 타격을 가한 것이다. 그 바깥을 삭제 혹은 말소시킴으로써가 아니라(다시 말해 환상을 부정하고 거부함으로써가 아니라) 바로 그 바깥을 향해 돌진함으로써 그렇게 했다(다시 말해 환상이 제시하는 ‘훼이크’한 조건 – 당신이 자본가들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유토피아가 올 것이다 – 을 글자 그대로 믿고 글자 그대로 실현함으로써). 그들은 환상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를 글자 그대로 믿어버림으로써 선택의 자유라는 말 근저에 뿌리박힌 부자유의 구조(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타자에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바로 그 때문에 ‘단지 환상 속에서’ 그 바깥을 꿈꾼다. 하지만 적군파의 자멸적인 테러는 환상 속에서만 살고 있던 이 바깥을 현실화해버렸다. 이를 통해 그들은 현실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끝없이 유보되어야만 했던 이 바깥의 정체(그것은 진정한 바깥이 아니라 단지 ‘안’이 유지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어떤 유보조건에 불과하다는 것)를 역설적으로 폭로해버렸다.

    2009년의 대한민국은 1970년대의 독일과 다르지 않다. 얼핏 보면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정권은 탈근대적이기기는커녕 전근대적인 정권이 아닌가? 하지만 국민은 이미 탈근대적인 국민이다. 이 두 가지 사이의 간극 그 자체가 탈근대적이다. 지금 이 상황은 청산되지 못한 ‘근대성의 부채’가 유령처럼 탈근대사회 속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빚을 떠안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 그것을 계속 갚아나가야 할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찔하다. 적군파 역시 독일의 역사가 청산하지 못했던 빚의 독촉장이었을 것이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제국’이라고 불렀던 이 외부 없는 시대에, 우리는 자칫 우리가 적군파처럼 될까봐 매우 조심하면서 살고 있다. 알렌카 주판치치가 [실재의 윤리]에서 썼던 표현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환상을 실현하지 않기 위해서 매우 조심하고 있다.” 환상의 실현(예컨대 테러나 범죄)은 환상의 은밀한 목적(대타자의 완전성을 복원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에 위배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2009년 대한민국에서 가능한 정치적 행위가 있다면, 이 ‘환상의 실현’과 관련된 행위일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구조를 폭로하고 그것의 안정성에 도전하는 것을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며 말이다. 지젝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상징적 동일시(법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의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환상의 수준에도 존재한다. 우리 자신의 환상과 대면하는 것이 정치적 행위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적군파처럼 자멸하지 않고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환상이 현실화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현실적 폭력이 아닌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최근 전시장에서 접한 몇몇 젊은 작가들의 작업은 거기에 대한 답은 아니더라도 어떤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조금 후에 이야기할 조현택, 이상현, 김민경-장윤주의 작업이 그것이다. 얼핏 적군파와 이들은 관계없어 보인다. 이들은 테러나 폭력을 다루고 있지도 않으며, 민족이니 국가니 혁명이니 하는 거창한 범주를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의 작업은 소소한 일상이나 개인적인 관심사를 다루면서 비교적 평온한 감정을 이끌어내며, 그런 점에서 확실히 비장함이 탈각된 21세기의 문화에 속한다. 또한 이들은 아직 작가 경력의 시작점에 서 있다. (이 네 사람은 모두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젊은 작가들이다) 지금까지 온 길보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욱 많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리뷰를 하는 것도 무리이다. 다만 내가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이들의 작업 속에서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시각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흔히 88만원 세대라고 불려지는 이 새로운 세대는 정치적 의식이 없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젊은이들도 분명 있다는 것, 하지만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룬다는 것을 이들의 작업은 보여준다.

    예컨대 조현택(개인전[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2009. 6.23 – 7.10, 대안공간 풀)의 사진작업을 한번 보자. 이 작업들은 작가가 어린시절을 보낸 전라도 나주 지역의 중학생들을 등장시킨 일종의 연출사진이다. 작가는 일단 콘티를 짜고 설정을 한 뒤 중학생들을 섭외하여 모델로 기용했다. 얼핏 보면 소년시절에 대한 향수가 묻어나는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이 사진들에서 어린 중학생들이 하고 있는 행동은 일종의 흉내내기인데, 이 흉내내기는 어떤 의식적인 모방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화된 어떤 문화적 코드,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초적 폭력성과 가부장적 문화의 코드들이다. 장면들은 대체로 조폭, 불량학생, 운동선수, 폭주족 등 ‘마초’ 혹은 ‘수컷’의 집단문화와 관련된 것들이며, ‘어디선가 많이 본’ 영화의 장면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좁고 허름한 여관방처럼 보이는 실내에서 다섯 명의 소년들이 모여있는 사진을 보자. 보스처럼 보이는 소년이 의자에 길게 누워있고, 나머지는 군기가 들어간 자세를 하고 무릎을 꿇고 있거나 불에 달군 꼬챙이로 문신을 새기고 있다. 사실상 이들이 하고 있는 일이나 하고 있는 자세는 섬찟하기까지 한데, 중학생밖에 안되는 어린 소년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나 이 장면 자체가 향수어린 시선으로 세팅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얼핏 귀엽다는 느낌이 앞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소년들이 귀엽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더 불편하게 느껴진다. 한참 누나뻘로 보이는 여자와 정사를 벌인 직후의 장면을 연출한 [여대생과의 정사]도 마찬가지이다. 침대 머리맡에 당당하게 앉아있는 어린 소년과 뒤편에서 이불로 몸을 가리고 있는 성인 여자의 대조(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아마 이것과는 상황이 정반대였을 듯?)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거북하게 느껴진다. 기타노 다케시의 [소나티네]를 명백히 패러디한 것처럼 보이는, 웃으면서 자신의 머리에 총을 대고 자살하는 흉내를 내는 소년이 등장하는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햇볕에 새카맣게 탄 채 즐겁게 이 놀이를 하고 있는 시골소년의 귀여움과, 그가 하고 있는 행위의 섬찟함 사이에서 이상한 간격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 장면들은 사진의 모델인 현재 중학생들의 실제 놀이문화도 아니고 작가의 과거도 아니다. 이렇게 놀았다고 보기엔 작가의 나이가 너무 젊을 뿐 아니라 이 흉내내기 놀이의 은근한 작위성과 과도함은 현실이 아님을 암시한다. 이런 어긋남 혹은 간격은 시간적인 것이기도 하고 공간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선 시간적으로는, 우선 작가 자신의 중학생 시절과 지금 중학생들 사이의 간격이 있다. 작가도 작가노트에서 지적했듯이, 요즘 중학생들은 이러고 놀지 않는다. 그들은 들로 산으로 쏘다니면서 마초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피씨방이나 학원에 가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사진을 보는 우리들은 순간적으로 이들이 실제로 이러고 논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음으로는, 작가가 실제 경험했던 과거 청소년들의 놀이문화와 그것을 연출화한 현재의 시선(다분히 향수어린) 사이의 간격이다. 고등학생이면 어른 흉내를 내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겠지만, 중학생들은 아무리 어른 흉내를 내어도 전혀 어른 같지가 않다. 이들은 아무리 ‘오토바이 폭주족’이 되려고 애써도 자전거타는 동네 어린애들로 보이는 것이다. 중학생 모델의 앙상한 팔뚝과 젖살이 덜 빠진 얼굴들은 이들이 하고 있는 마초적 행위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이들이 돌아다니는 허름한 시골 동네나 여관방과, 그들이 흉내내는 장면들의 ‘멋지구리한 아우라’간의 간격도 있다.

    결국 이 장면들의 우스꽝스러움과 간격은 여러 가지 시공간적 자료를 마구 뒤섞은 결과로 나온 것이다. 여기서 환상의 필터가 작동하는 지점은 이 장면 자체라기보다는 이 장면을 만들어낸 작가 자신의 시선(2009년의 20대이기도 하고, 과거의 어떤 시점의 중학생이기도 하며, 성인남자이기도 하고, 소년이기도 하고, 순진하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한 그 모든 성격의 복합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작가 노트에서, “다큐메터리 작업을 2년간 해봤으나 사진이 더 이상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과 진실이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으며 “스스로의 자위행위로서의 작업이 아닌 작업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사실 연출사진은 한때 급속도로 유행하다가 그 기법 자체가 상투화되면서 시들해져버린 방식이기도 하다. 조현택의 사진이 그 상투화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사진들이 개인적 삶이 사실은 코드화된 삶이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이는 이미 다양한 연출사진들이 이미 해왔던 일이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점이다. 사진 속의 소년들은 단지 연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으며, 작가 자신도 이 작업을 통해 개인적 즐거움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이 즐거움은 사실 ‘길티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남성적 마초문화의 상투형을 내면화하는 것이 이 즐거움과 분리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즐겁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워하는 자신에게 죄의식이 느껴진다. (결국 이 순진했던 소년들이 조폭이 되고, 부하를 괴롭히는 상사가 되고, 뇌물 받아먹는 정치인이 되고…이런 상상을 해보라) 그래서 핵심은 이 사진에 대해 작가 자신과 모델들, 관객들이 느끼는 ‘즐거움’이 허위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이라는 데 있다. 그것이 단순히 허위적 즐거움이라면 즐기기를 그만두면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문제는 오히려 더 심각하다. (그래서 이 장면을 보는 작가 자신의 향수어린 시선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품의 핵심이다. 가장 개인적인 만족의 행위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사회를 비판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죄의식은 환상의 실현이 어째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현실로 접근하는 통로인 것인지를 말해준다.

    이상현(개인전 [나는 언젠가 리움에서 회고전을 가지는게 꿈입니다], 2009.7.14-7.31, 대안공간 풀)의 경우도 ‘현실에 접근하는 통로로서의 환상’을 다룬다. 다만 이 경우 방향은 반대이다. 스스로를 냉소하지 않고서는 비판의 지점에 다가갈 수 없는 자기분열적 상황은 이번에는 결과가 아니라 출발점으로 주어진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고 자본주의와 대기업의 권력에 대해서 비판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 대기업 삼성에서 20년간 일했던 아버지와 거기서 나온 돈으로 살아온 자기 자신과 가족들이 있다. 평생 충성을 다한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회사에 다녔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버지를 작가는 연민과 씁쓸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바라본다. 삼성에서 대준 학자금으로 학교를 다닌 자신과 형제들, 삼성에서 건설하는 재건축 아파트에 살게 될 날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이다. 이 분열과 불편함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작가가 선택한 것은 오타쿠 문화. 속칭 ‘모에’ 문화의 차용이다. 그는 현실을 일종의 게임으로 만들고 현실의 자료들을 2차 창작물의 재료로 사용함으로써 현실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고 한다. 작가는 [삼성과 나]에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삼성’에 얽힌 이야기들을 그래프, 드로잉, 사진, 통계표 등으로 재가공하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현실을 허구화하고자 한다. 즉 견고한 현실을 가변적인 게임의 재료로 재창조하고자 한다. 물론 이런 행위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이 행위는 도피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이중의 ‘잘 알고 있음’은 단순한 도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현실을 허구화하는 전략은 속칭 ‘잠입액션’이라고 불리는 컴퓨터 게임과 연관이 있다. 작가 자신이 차용했다고 말하는 게임은 ‘메탈기어 솔리드’이다. 이 게임에는 대규모 폭발이나 대형 전투가 등장하지 않으며 대신 적진에 인질로 잡힌 우리 편을 구해내기 위해 적의 기지에 몰래 잠입하는 설정이 있다. 중요한 것은, ‘비밀리에’ ‘잠입’한다는 것이다. 적의 기지를 파괴하면 인질도(그리고 거기 들어간 자기 자신도) 죽는다. 이 딜레마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탈근대사회의 딜레마, 즉 적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 밖에 없는 딜레마와 매우 유사하다.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몰래 기지에 접근해서 인질을 빼내오는 것이다. 작가가 작업 속에 게임 화면을 직접 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게임적인 방법으로 재료들을 다루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이와 관련된다.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게임의 감각적 화면과는 대조적으로 건조한 자료들, 즉 청사진 도면, 드로잉, 문서, 숫자, 기계 등이 있다. 이것들은 한편으로는 분명 명확한 객관적 자료들(레미안 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해 빌린 융자금 액수와 이자율이라던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지점에서 허구적인 게임의 자료로 변형된다.

    이런 전략은 [삼성과 나]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근대사의 트라우마들을 소재로 한 가공의 이야기 [서울특별시 전 방위 방어 요격 시스템(가칭) 조사 보고서]에서 좀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html 문서, 청사진, 조직도, 도면, 위성사진, 기계 공작물 등등의 장치를 통해 작가는 서울 시청이 유사시 적의 공격을 무력화하기 위한 미사일 요격본부라는 ‘극비사실’을 그럴듯한 모양새로 만들어서 보여준다. 시청 건물이 유사시 거대 로봇으로 변환될 수 있는 장치를 갖고 있다던가, 시청 지하에 대 테러 전략 시설 담당실과 핵 보존동, 격납고, 무기고, 주군지 등이 있다거나, 국회 의사당에 미사일 기지가 있다거나, 시청 지하본부가 무력화되면 남산터널이 대신 임무를 수행한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관객이 패스워드를 입력해야 볼 수 있는, ‘전시에는 소각을 요하는’ 1급 기밀문서의 표지에는 “이 문서는 국가 안전 보장에 관한 필요 불가결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mj-12 클리어런스 레벨을 소유하는 자 이외의 취급을 엄중히 금지한다”라는 그럴듯한 문구가 쓰여 있다. 제공된 힌트에 따라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안으로 들어가면 실제 문서를 복사한 느낌이 들도록 의도적으로 비뚤게 배치된 문서들이 나타나는데, 실감을 더하기 위해 검은 매직으로 삭제한 부분, 메모와 낙서 등을 첨가해놓았다. 또한 이런 허구적 이야기를 실제 역사적 사건과 엮어놓음으로써 그럴듯한 느낌을 더했다. 문서에 따르면 이 특급비밀전략과 관련된 실제 사건으로 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78년 KAL기 피격사건, 1979년 김형욱 실종과 10. 26, 1991년 노태우-고르바초프 회동 등이 있다. 또한 ‘더블 스피커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어서, 비밀요원들에게 암호를 전달하기 위해 유행가 가사를 이용한다는 설정을 보여준다. 예컨대 ‘가슴’이라는 단어는 ‘언론조작’을, ‘그대’라는 단어는 ‘주요인물 납치’를 의미한다는 식이다. 관객이 직접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전시장에 아이팟을 배치했는데, 들어보면 그야말로 평범한 노래들이다. 하지만 ‘더블 스피커 시스템’에 대한 설명 덕분에 노래를 듣는 행위는 일종의 게임이 된다.

    [서울특별시…]가 제시하는 세계는 사실 특이한 것이 아니라 상투적인 음모이론의 세계이다. 실제로 각종 음모가 횡행했던 한국 현대사에서 음모론의 설득력은 매우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해왔다.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음모인지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헐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묘사되듯이, 음모론 그 자체는 사실 편집증적 망상의 산물이다. 하지만 음모론의 진실은, 망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현실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허구는 허구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 있다. 이상현이 만든 자료나 문서들은 사실 매우 엉성해서, 그렇게 ‘진짜’ 같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작품의 결함은 아니다. 이상현의 내러티브 게임이 재미있는 지점은, 그것이 현실을 허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거꾸로 허구를 현실화한다는 것이다. ‘모에 문화’는 아무리 엄숙하고 비장한 원본이라도 2차 창작물 속에서는 우스꽝스럽게 바꾸어버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본의 비장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에 문화가 보여주는 것은, 모에 행위 그 자체의 비장함이다. 즉 모에 문화는 단지 허구에 불과한 것이 어떻게 현실적 힘을 행사하는가를 증명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음모론이 허구라는 사실은 그것이 갖는 현실적 힘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허구가 현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는 한, 그것은 이미 ‘단지 허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서울특별시…]는 현대사의 트라우마들을 가벼운 허구로 바꿈으로써 거꾸로 허구의 무거운 힘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이 어느 정도로 성공했는가에 대한 평가는 별개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기본 설정에 있어서는 의미있는 구도를 보여준다)

    김민경-장윤주의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정물](인천여성비엔날레, 2009.8.1-8.31)은 타자를 보는 시선의 문제를 통해 ‘환상과 더불어 살기’에 접근하고 있다. 이 작업은 인천 차이나타운이라는, 우리 옆에 오랫동안 존재해왔지만 거기에 대해 깊이 알려고 한 적이 거의 없었던 어떤 공간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들이 리써치해서 쓴 텍스트가 담고 있는 내용처럼, 인천 차이나타운은 현대사의 정치적 트라우마가 결집되어 있는 곳 중 하나로(작가들의 글에 따르면, 한국 화교의 99퍼센트가 산둥성, 즉 대륙 출신이다. 하지만 그들은 중국에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망명자들이었다. 한국 사회의 화교차별에 시달리면서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지도 못하고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가지지 못한 채 살아온 화교들은 90년대 이후 한국과 중국의 수교 및 타이완의 본토화 경향 이후 또 다른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냉전과 전쟁의 역사, 글로벌리제이션, 다문화와 디아스포라의 문제 등 복잡한 정치학이 혼종된 공간이다. 이곳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적산가옥들의 역사적 가치 때문에 개발이 제한되어 있어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옛 동네이기도 하다. ‘한중문화관’이라는 다소 키치적이고 과장된 스타일의 새 건물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오래된 집들과 가동을 멈춘 제분공장(최근 이 공장은 ‘인천아트플랫폼’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맛없는) 중국음식점들이다.

    김민경-장윤주가 이 지역을 다루는 방식은 사실관계를 파고드는 연구나 고발성 다큐 같은 것은 아니다. 이들이 작업을 시작한 의도 자체는 상당히 묵직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작가노트에 따르면, 이 작업의 의도는 “동아시아라는 지역의 정치ㆍ문화적 지형도를 되짚어보며 미술로서 이에 대한 순환적 이해를 도모하는 프로그램의 취지하에, 한국이라는 하나의 문화권 안에서 비주류 민족으로서 혼재된 정체성을 지닌 차이나타운의 모습을 포착”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접근하는 방식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가볍게 산책하는 느낌으로 이 지역을 거닐면서 몇몇 물건들을 수집하고 풍경을 사진찍어 제목 그대로 차이나타운에 대한 ‘정물화’를 만든다. 정물화는 ‘still life’라는 영어 제목처럼 정지된 생명, 그러니까 생생한 원래의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박제된 인공적 세계를 구성하는 작업이다. (심지어 정물화는 프랑스어로는 nature morte, 즉 ‘죽은 자연’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물건(길에 버려진 물건들)을 모아서 글자 그대로의 정물화를 그리고 같은 배치를 사진으로 찍어 엽서로 만들어 전시장에 비치했다. 또한 차이나타운 풍경 사진들을 슬라이드로 만들어 상영한다. 3대의 슬라이드는 조형적 고려를 통해 배치된 서로 다른 사각형의 영상을 투사하는데, 이 배치 그 자체가 정물화라는 느낌을 강화시킨다. 한 개의 슬라이드는 글자 그대로 정물화처럼 움직이지 않는 영상이며 다른 두 개는 시차를 두고 바뀐다. 이 슬라이드 사진들은 차이나타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그곳에 대한 주관적 기억이며 조각 조각 떼어서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올 수 있는 일종의 ‘수집품’으로서의 풍경에 대해 말해준다. 사진의 내용은 특별히 기념비적이거나 스펙터클하지 않은, 그냥 보아서는 어딘지 알기도 어려운(군데 군데 중국어가 쓰여있는 가게 문 등은 예외지만) 그런 골목의 풍경들이다. 여기서 소재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정서이다. 버려진 의자나 부서진 상자 같은 퇴락한 물건들, 빛바랜 간판들은 이곳이 쇠락해가는 곳임을 암시한다.

    쇠락해가는 공간으로서 차이나타운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는 작가들 자신의 말처럼 ‘17세기 바니타스 정물 풍으로’ 만든 정물 사진(그리고 똑같은 배치를 그림으로 그린 정물화)에서도 드러난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꽃, 시계, 먹다 남은 환타캔과 붉은색 바탕이 있는 흰 목장갑, 종이로 접은 딱지 등은 사실 차이나타운에서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평범하다 못해 평범 이하의 물건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물화는 기묘한 아우라를 갖는다. 그것은 아마도 차이나타운이라는 이름 자체가 주는 이국정서가 사물을 자체가 가진 특성에 거꾸로 투사된 덕분일 것이다. 요컨대 작가들이 사물을 선택하는 기준은 중국적인 느낌이 나는가 아닌가가 아니다. 만약 그런 시각을 택했더라면 이 작업은 이국적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것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들이 선택한 것은 스펙터클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들의 시선이 가진 상투성(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성을 가진)이다. 쇠락해가는 공간을 바라보는 작가들의 시선은 이 공간을 환상공간에서 재창조하고 복원하려는 욕망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정물화’ 혹은 ‘죽은 자연’으로는 그런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들의 시선은 상당 부분 연민어린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정물화 만들기’ 작업을 통해 작가들은 소멸과 복원이라는 두 항에 걸쳐 만들어지는 어떤 허구의 공간을 창조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사실상 하나의 시선을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지젝의 설명을 빌리자면, 환상의 진정한 대상은 환상장면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나 자신의 시선이다) 어떤 지점에서는 이 시선의 힘이 다소 약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의 작업은 개성적이다. 타자의 시선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시선이 가진 어려움은, 그것이 단순히 상투적 모방에 불과한 허구라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이라는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의 기록
    공주형(미술평론가/인천대학교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1.
    만약 우주에 간 당신이 가져간 산소 공급 장치에 문제가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문제는 당신의 비극적 운명이 거의 눈앞에 다가 온 순간 당신에게 산소 공급 장치를 보내줄 수 있는 지구가 너무 멀리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비닐봉지와 마분지 상자, 절연 테이프와 양말 한 짝 등 눈에 띄는 물건들 중 차선으로 최선인 것들로 산소 공급 장치를 만들어 보는 것도 최악의 순간에 감행해 볼 수 있는 최후의 시도일 것이다. 실제로 이 일은 1970년 4월 달 착륙에 성공한 아폴로 13호에 탑재된 이산화탄소 여과기 고장으로 말미암아 우주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할 번 한 세 명의 우주비행사가 지구로의 무사생환하기 전 겪었던 에피소드이다. 우주비행사들의 최첨단 우주 장비와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재료들로 급조된 이산화탄소 여과기처럼 ‘클루지(Kluge)’는 어떤 문제에 대해 세련되지 않으며 서툴고 투박하나 실제로 유효한 해결책을 의미한다. 번듯한 작업이 아니라 다음 작업을 위한 예비적 단계와 같이 미완의 느슨함을 드러내는 형식으로 미술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인문 ․ 사회적 문제에 폭넓은 관심을 문제 제기 형식으로 제기하는 김장프랙티스 작업은 일종의 예술적 클루지이다.

    지역과 도시를 기반으로 하여 동시대인들의 정체성과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문화권에 속한 이들과 지속적으로 네트워킹을 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작업의 지향을 이렇게 밝히는 김장프랙티스는 ‘장소’를 의미 있는 작업의 출발점이자 발언의 무대로 삼는다. 동아시아, 인도네시아, 중국의 상하이, 미국의 피츠버그, 한국의 서울과 청주, 차이나타운, 송도 등. 대륙과 국가의 경계, 도시와 행정구역상 그 하위 단위까지를 두루 섭렵하고, 지속적으로 응시하며, 자연스레 작업으로 연장하는 이들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장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7년 대안문화공간 풀에서 진행되었던 지역과 미술에 관한 프로그램〈동아시아의 목소리: 개발과 저항〉에 참여하면서 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이들이 지리적 문화적 단위라 보편적으로 분류되고 믿어져 온 ‘동아시아’가 실상은 국내외의 복잡한 정치 지형에 따라 끊임없이 성격을 달리하는 장소임을 인식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2.
    글로컬 시대의 도래와 함께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조명되고 있으나 합의되지 않은 정의의 난립이 보여주듯 장소는 규정이 쉽지 않은 개념이다. 김장프랙티스는 이것을 명확한 경계로 금 그어진 정태적이고 견고한 영역이 아니라 행위와 사건의 장으로 유동하는 실체로 전제한다. 실제로 이들 작업에서 일관되게 중량감을 가져왔던 장소에 대한 체험과 정서적 반응 그리고 지각 작용은 이런 전제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 가능한 것이다.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정물]은 이들 작업 지향과 출발 그리고 전제를 확인할 수 있는 작업이다. 이들은 차이나타운에서 직접 수집한 화려하고 고장 난 정물들을 이 장소의 쇠락함 그것에 대한 확증으로 제시한다. 과도하게 채색되어 있고, 일부 기능의 상실로 용도가 폐기된 정물들은 문화 산업을 위한 선전 도구로 전락한 장소와 그 곳의 진정성에 접근할 기회를 원천봉쇄당한 당한 차이나타운에 대한 담담한 진술이다. 하지만 한국 내에서 비주류 집단을 상징하는 특정 장소의 박제된 풍경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전쟁처럼 근대화를 치룬 동아시아의 보편적 풍경일 수 있다.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정물]이 왜곡된 채 소비되어 온 장소성에 대한 환기였다면 2010년 김장프랙티스의 [투어 맵: 송도(Tourmap : SONGDO)]는 일사불란하게 생성의 와중에 있는 장소의 허위성을 노출시킨다. 국제도시를 지향하는 송도는 도시의 비전을 ‘미래’로 슬로건화 하고 있으나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파괴와 건설이라는 전형적인 과거 회귀적 방법이 동원되는 아이러니한 장소이다. [투어 맵: 송도(Tourmap : SONGDO)]는 리서치와 답사를 토대로 송도국제도시의 급조되고 있는 장소성을 확인할 수 있는 12개의 지점을 관광 지도 형태로 제안한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정물]이 그러했듯 인천광역시 연수구 송도동이라는 특정 장소가 아니라 21세기 개발과 재개발이 이슈가 되었던 지역에서 반복적으로 목격되어 온 폭력적이고도 낯선 맥락을 환기시킨다.

    3.
    김장프랙티스가 다루어 온 지속된 뒤틀린 장소성과 생성 중인 허위적 장소성은 <택시 투어(taxi tour)>에서 은폐된 장소성으로 동선을 확장한다. 일종의 정보 전달 놀이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업은 발신자와 수신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마무리 된다. 이 작업 최초의 발신자는 상하이에 머물며 글쓰기 작업을 하고 있는 호주 국적의 중국인이다. 최초의 발신자는 정보 공유를 원하는 특정 장소에 대한 정보를 글과 그림의 형식으로 전송 혹은 오브제의 형태로 전달하고 김장프랙티스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수신 정보를 국내에서 리서치와 답사 그리고 시각화 작업을 통해 재배치한다. 이렇게 시각화된 작업은 다른 세 개의 나라 의 도시들을 같은 콘셉트로 작업한 결과물들과 함께 전시와 아트 북 《가이드북 만들기의 실제》로 출간 ․ 배포 과정을 거쳐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제공될 예정이다.

    상하이는 황푸(Hahgpu) 강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뉜다. 서쪽은 푸시(Puxi), 동쪽을 푸동(Pudong)으로 부른다. 푸시는 구시가지로 그물망처럼 퍼져있는 좁은 골목길과 그보다 조금 더 넓은 몇 개의 주요 거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푸동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개발된 넓은 거리들과 더 큰 건물단지들로 이루어진 신시가지이다.( <택시 투어(taxi tour)> 中)

    상하이에서 김장프랙티스에게 전송된 영문 텍스트의 시작은 이 도시에 대한 일반적인 여행 에세이 혹은 여행 가이드북과 시작에서는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상하이의 작가는 이 도시의 지리적 위치를 설명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상하이의 심각한 교통 체증을 이야기 하고, 상하이 택시 운전기사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상세하게 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인터뷰를 통해 ‘베이징의 택시 운전기사들은 중국의 정치, 철학, 시사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비해 상하이 택시 운전기사들은 불평불만을 좋아한다.’는 것과 척박한 노동 환경과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는 이들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결국 상하이의 작가가 타인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싶어 한 장소는 다름 아닌 택시 운전기사들의 쉼터였다. 텍스트로 전달된 상하이 택시 운전기사들이 빠르게 저렴한 비용을 치르고 식사를 하고, 짧게 낮잠을 자기도 하는 쉼터는 아쉽게도 상하이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동방명주탑(東方明珠塔)이나 와이탄(外灘) 같은 명소들처럼 오시는 길에 대한 상세하고 친절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 장소이다. 이곳은 대략 다른 차량의 운행이나 주차에 방해가 되지 않으며, 잠시이라도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으며, 언제든 승객을 찾아나 설 수 있을 만큼 도로에 인접해 있다. 흥미로운 곳은 이 장소가 찾기는 막막하나 분명 상하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차이나타운과 동아시아가 다르지 않았고, 송도와 여타 신도시의 풍광이 엇비슷했듯이 김장프랙티스는 상하이 택시 운전기사들의 쉼터와 같은 장소를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고자 했다. 어디든 존재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안내의 수단이 필요했던 이들은 길을 잃지 않고 이 장소를 찾기 위해 타인을 태우고 늘 이동 중인 택시를 선택했다. 상하이에서 도착한 영문을 한국어로 번역한 네 점의 텍스트와 함께 <택시 투어(taxi tour)>를 구성하는 아홉 점의 사진은 바로 이 여정 중에 포착되고 수집된 풍경들이다.

    4.
    시대와 역사 그리고 집단은 존재의 은폐가 묵인되는 장소에서 기억과 기록의 당위와 명분을 유보하고 삭제하지만 개인은 다르다. 이들에게 이곳은 명백한 사건과 행위 그리고 의미 생성의 장으로 충분히 비록 그 기억이 사적인 수준일지라도 기록될만한 것이다. 김장프랙티스의 <택시 투어(taxi tour)>에서 하얀 색과 노란 색으로 또렷하게 금 그어진 선은 동일한 성격의 장소를 교차하는 상반된 시각의 모호함을 표출하기 위한 의문 부호에 다름 아니다. 이 작업에서 구체적 정황으로 담긴 풍경은 의미가 없는 장소가 아니라 의미 부여의 과정이 유보되고 간과된 장소이다.
    이 전시 《기억애》에서 이들은 전시장 내의 ‘비장소’(non-places) 혹은 ‘빈 공간들'(empty spaces)을 <택시 투어(taxi tour)>를 위한 자리로 지정하고 요청한다. 굳이 아무도 탐하지 않는 다른 작가들의 작업과 작업 그 사이 남겨지거나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는 장소를 선점하고자 분투하는 김장프랙티스의 지점에서 이들 작업의 뜻을 읽는다. 거창한 역사의 번쩍이는 기념비가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의 침착한 이정표가 되고자 하는.


    <안녕없는 생활들, 모험들>(부산시립미술관, 2011.12-2012.02)의 참여작가를 맵으로 구성하였다. 참여작가들의 작업에서 특징적인 단어와 개념을 추출하고 이를 직관적 인상에 기대어 임의로 구성한 도형으로 치환한다. 이도형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개별 작가들의 도형은 좌표위에 얹혀서 그래프로 보여지는데, 이 그래프는 일종의 <안녕없는 생활들, 모험들>의 전시망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맵이 될 수도 있지만, 그 도형이 위치하게 되는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좌표가 지시하는 객관적 의미에서의 맵을 제시한다기 보다는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참여작가들의 관계망을 자의적으로 구성한 과정 자체를 드려내보고자 함이다.